행위 언약에서 은혜 언약까지의 구속사적 여정
깊이 들여다보면 성경은 인간의 비참한 상태와 죄의 형벌 앞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관계를 맺으실 때 늘 언약(covenant)이라는 방식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언약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인격적 약속이며 타락한 인류를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도구입니다. 여기서는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의 핵심을 간결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1. 행위언약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신 뒤 그와 특별한 법적·인격적 관계를 세우셨습니다. 이를 흔히 ‘행위 언약’이라 부릅니다. 창세기 2장 16~17절의 명령은 단순한 금지령이 아니라 언약의 구조를 품고 있습니다. “동산의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은 순종하면 생명을, 불순종하면 사망을 약속하는 조건부 관계였습니다. 아담은 온 인류를 대표하는 당사자로 이 언약에 들어갔습니다.
행위 언약의 주요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 당사자: 창조주 하나님과 인류의 대표 아담
- 조건: 아담의 완전하고 개인적인 순종
- 약속: 영원한 생명(생명나무로 상징)
- 형벌: 불순종 시 사망(영적·육체적·영원한 죽음)
- 표징: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아담의 실패로 보아 행위 언약은 역사적으로 파기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그 요구(완전한 순종)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의(순종)를 요구하시고, 그 기준에 못 미칠 때 심판하십니다. 문제는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그 요구를 만족시킬 능력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 점이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넣는 동시에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길이 됩니다.
은혜 언약(구속과 회복의 약속)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죽음이 들어왔을 때, 하나님은 곧바로 구원의 약속을 드러내십니다. 은혜 언약은 타락 이후 만들어진 임기응변의 계획이 아니라, 창세 전에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 합의된 구속의 계획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행위 언약의 요구를 대신 충족시키시고, 그 유익을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언약의 중보자입니다.
은혜 언약의 핵심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 당사자: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택함 받은 백성
- 조건: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 믿음 자체도 하나님의 선물)
- 약속: 죄 사함, 의롭다 함, 영원한 생명, 하나님과의 화목
- 성격: 무조건적 은혜(Sola Gratia)
또한 은혜 언약은 ‘단일성’과 ‘다양성’이라는 두 측면을 가집니다. 본질적으로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의 구속 사건이지만, 역사 속에서 그 언약이 계시되는 방식은 시대마다 다르게 나타납니다.
2. 언약의 경륜 — 구약에서 신약까지
하나님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은혜 언약을 점차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이를 ‘언약의 경륜’이라고 부릅니다. 구약의 여러 사건들은 모두 구속사의 큰 그림 안에서 은혜의 계시를 예비합니다.
- 창세기 초기(아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한 아들에 대한 약속(창 3:15) — 원시복음의 예표
- 노아: 세상을 보존하는 언약을 통해 인류 구속의 터전 마련
-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하여 복의 통로가 되게 하심
- 모세: 율법과 제사를 통해 죄를 드러내고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
- 다윗: 영원한 왕위 약속을 통해 메시아 사역을 기다리게 함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 언약은 성취됩니다. 복잡한 제사 제도나 예표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통해 언약의 복이 실제로 적용됩니다.
3. 구약과 신약의 본질적 동일성
흔히 구약은 ‘법’, 신약은 ‘은혜’라고 단순히 나누지만, 조직신학적 관점에서는 은혜 언약의 본질은 구약과 신약이 동일합니다.
- 구원의 근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구약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 신약은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
- 구원의 수단: 오직 믿음(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과 동일한 원리)
- 구원의 주체: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
4. 맺음말
행위 언약은 하나님의 공의와 완전한 기준을 드러내 우리 자신의 무능력을 일깨워 줍니다. 은혜 언약은 바로 그 무능력의 현장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을 확증합니다. 우리는 행위 언약 아래서는 소망이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대신 완성하신 은혜 언약 안에서 참된 안식과 확신을 누립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그림자를 보고 걸어갔다면, 우리는 그 그림자의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보고 걸어갑니다. 그러나 믿음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신실한 언약적 사랑이 오늘 우리의 삶을 붙드는 가장 든든한 토대입니다.